육군군악대가 한국근대음악사에 미친 영향
(PROPOSAL)
I. 서 론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최초의 서양식 악대인 양악대의 초대 지휘자이자 양악대장이었던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높은 평가가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져 왔다. 국왕의 지위를 황제로 격상시킨 고종은 그에 걸맞는 힘과 상징을 필요로 했고 그에 따른 필요급부로 탄생한 양악대는 이후 한국 서양음악의 모태가 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음악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양악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는 역경 속에서도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경성악대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일제시대 한국음악사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교육받은 김인식, 이상준, 홍난파 등 건반악기와 현악기 류의 계파와 에케르트로부터 교육받은 정사인, 백우용 등의 관악기 류의 계파의 두가지 큰 줄기로 흐름을 이어오게 되었다.
경성악대의 해체로 말미암아 프리랜서가 된 과거의 양악대원들은 1928년 경성제국관현악단을 조직하였고 이것은 후에 1934년 경성관현악단, 1936년의 경성방송관현악단으로 보다 전문적인 교향악단의 시대로 진입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40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민간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던 조선교향악단은 경성관현악단과 경성방송관현악단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하였는데 이것은 곧 이 일련의 단체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그 태생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의 양악은 6.25 전쟁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각종 민간음악단체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해산을 하거나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9.28 서울 수복을 계기로 음악인들은 ‘군대’에서 재집결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모든 사회환경이 軍 이라는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음악인들이 재집결 하는데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한편 이 당시 軍을 중심으로 집결된 한국 양악(특히 관악) 연주자들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갈라진다.
첫 번째는 1946년 3월 8일 최초의 근대적 형태의 군악대인 육군 군악대가 창설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51년 이와는 별도로 창단된 ‘육군 교향악단’이다.
육군 군악대는 1946년 제 1연대 군악대로 창설된 이래 1948년 육군 본부 군악대로 개칭되고 이후 8개의 군악대가 연달아 창설되었다. 1949년 창설된 군악학교는 당시 유일무이한 국가 음악교육기관으로서 이곳을 통해 휴전 후 한국 음악계의 주축이 되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군 교향악단 역시 이 군악학교 내의 연주하사관과 본관 2기생을 주축으로 연주자들이 편성되었으므로 광의의 개념으로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게 된 것은 휴전이후 성장하는 노선이 각기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육군 군악대는 6.25 전쟁 발발이후 휴전 협정 전까지 수도사단 군악대(1950. 9. 21)을 비롯하여 11개 부대가 창설되었고 이후 월남전 해외파병(1965), 국악대(國樂隊)창설(1968), 아시안게임(1986), 서울 올림픽(1988), 한일월드컵(2002) 등 큰 행사들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편 육군교향악단은 1951년 5월 17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창단기념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56년 제22회 정기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고 KBS 심포니로 개편되었다. 방송국의 전속 악단이었던 KBS심포니는 1969년 2월 다시 국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고 경제발전기에 한국의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1982년 KBS 교향악단으로 인수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병행하는 흐름으로는 육군교향악단보다 1년 앞서 창단된 ‘해군문화선무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 발발 직후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에서도 음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해군문화선무대는 이후 1950년 10월 1일 소속 대원 120명 전원을 해군문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정훈음악대’를 창설하였다. 이후 해군정훈음악대는 1956년 3월 28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정기 연주회때부터 명칭을 ‘해군 교향악단’으로 바꾸고 부대홍보와 장병사기양양을 위한 위문연주 위주의 정훔음악대가 아니라 정규 교향악단으로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해군 교향악단은 1957년 3월 문화예술사절단으로 싱가포르, 홍콩, 대만등 해외순방연주도 성공적으로 마치며 지명도를 높혔으며 이 연주여행을 마치고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재발족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림교향악단의 창단은 해군교향악단을 서울특별시가 흡수하여 된것인데 이후 1978년 7월 단체운영권이 서울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되면서 세계적인 연주회장을 확보하며 명실상부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관현악단인 KBS관현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역사이다.
이렇듯 전쟁과 군사정권이라는 특수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기점으로 한국의 관현악단의 주요 흐름이 군악대로부터 나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경숙, 노동은, 민경찬, 김춘미 등 한국근대음악사학자들의 연구에서 군악대가 한국근대음악에 미친 영향은 단편적인 사례로 설명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서론에 나왔던 다른 하나의 계파인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교육은 또다른 큰 기여를 하였음에 분명하다. 특히 숭실학교의 경우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가인 김인식(1885~1962),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1893~1978),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1906~1965), 성악가이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설립자인 현제명(1903~1960),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인 김동진(1913~미상)등 근대음악문화를 개척한 엘리트들을 대거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1세대 음악가들은 이후 휘문학교, 진명학교, 배재학교, 경신학교, 기호학교 등의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을 가르켰고 이후 동경유학학파를 시작으로 정명훈의 차이코프스키 콩쿨 입상(1974)이후 한국 엘리트음악의 독자적인 계파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흐름은 공통점도 갖지만 일련의 차이점도 가지며 근대한국음악사에 중요한 병렬구조를 만들었다. 우선 ①군악대는 국가가 주도한 기관음악이었던 반면 학교기관은 민간활동이었던 점이고, ②군악대가 관악음악과 음악교육쪽에 많이 기여를 한 반면 학교기관출신은 주로 현악, 성악, 작곡 등 나머지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자적인 병렬구조의 한 축인 군악대의 흐름이 단편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성악대가 해체된 직후 재야에 있던 음악가들은 나름대로 민간음악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들이 이후 경성제국교향악단과 육군교향악단의 주축이 되었다. 또한 군악학교 졸업생들은 휴전 후 미 군정 시기때 미군 밴드에서 연주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캄보밴드(소인조밴드) 활동을 하던 인사들은 오늘날 한국에서 ‘재즈 1세대’라 불리며 클래식뿐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도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군악대의 흐름은 양악대에서 시작하여 경성악대, 군악대, 육군교향악단과 해군교향악단을 거쳐 KBS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구도를 가지고 한국 음악계에 기여하였고 대중음악계에도 기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관성에 주목한 연구가 없었던 현실에 주목하고 본 연구를 구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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