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자원준거관점에서 본 이순신장군의 근본적 경쟁력

자원준거관점에서 본 이순신장군의 근본적 경쟁력

 

 


 

 

서(序)

 

경영전략의 모델을 말할 때, 1950~60년대 미국 경제성장기에 있었던 기업임원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군인출신들이 많아서 군대조직과 기업조직이 유사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실제로 경영학을 보다 보면 전략(Strategy), 전술(Tactics), 워 게임(War-game), 시나리오(Scenario)등 군사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이 비단 20세기에 나타난 이론이긴 하지만, 과거의 전쟁사를 보는 것은 오늘날의 경영전략을 이해하는데 좋은 거울이 되기도 한다. 사관학교의 교재로 쓰이던 병법서인 손무의 <손자병법>이나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등은 사회과학서로 분류되어 있고 그밖에 많은 역사의 사례들은 오늘날 기업경영에 적잖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현대 전술의 개념

 

전쟁의 승패는 부대의 자원(Resource)활용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창의 끝에 해당하는 전투부대(Combat Unit)는 전투지원부대(Combat Support Unit), 전투 근무 지원부대(Combat Support Service Unit)의 반의반에 해당하는 규모인 만큼 군수자원과 전쟁지속능력은 현대 전투의 핵심이다. 더욱이 최근의 걸프전을 비롯해 동티모르 내전, 이라크 전등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전쟁지속능력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력에 달려있으며 자원조달 및 전시인력동원 능력은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을 미치고 있다.

물적 개념의 자원 외에도 지적개념의 자원 활용도 현대전의 핵심인데 이는 비대한 군대 조직의 Process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보자원 및 지적자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컴퓨터의 발달로 얼마나 고가치 표적에 대해 효율적으로 타격하느냐가 현대공격전술의 핵심이므로 각국은 재래식 인간정보를 넘어 군사위성, UAV(무인정찰기)등을 도입하여 적의 표적정보를 조금이라도 먼저,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식은 역사를 통해 발전 한다고 하지만 과거 이순신이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오늘날 전술학이나 경영학,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여러 이론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성웅 이순신

 

조선 최대의 위기였던 임진왜란에 나타난 이순신의 업적은 역사라기 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그는 평민의 아들로 32살의 뒤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서 승승장구하고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동안 23전 23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로 일본의 침략에서 조선을 지켜내었다. 그는 흔히 무장(武長)인 원균과 대비하여 지장(智長)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의 전술과 전략은 오늘날의 모든 군사학 교재에도 나올 만큼 혁신적이고 과학적이었으며 사회과학의 관점으로 보았을 경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그는 주어진 인적, 물적, 조직적 자원(resource)의 활용을 극대화하여 일본군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창출하였는데 대표적인 몇가지 전투를 통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옥포해전 (1592.05.07)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20일이 지나 발생한 최초의 전투인 옥포해전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면이 많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100년간의 통일내전으로 인해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은 피폐한 환경에 적에 대한 거의 무지한 정보로 인해 앞이 캄캄했다. 여기서 이순신이 채택한 전술은 바로 “화력의 집중”이다. 당시 일본의 주 무기였던 조총의 사거리는 조선의 화력무기인 총통의 사거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력을 집중하여 완전한 승리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보력의 우위의 결과이기도 하면서 통합 화력집중을 통해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전략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천해전 (1592.05.29)

 

사천해전에서는 조선의 비밀무기이자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 불리는 거북선이 등장하였다. 물론 이것의 등장으로 전쟁의 주도권이 바뀌어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옥포해전과 마찬가지로 사천해전을 준비하면서도 이순신은 다양한 조직 관리(Organizational Management)를 통해 내부역량을 강화하였다. 그는 민간인으로 축출된 격노병 중 경력자를 뽑아서 대장장이, 목수 등의 임무를 부여하여 전투를 준비하였고 각 지방에서 데리고 온 목수들과 함께 이 비밀병기를 제작하였다.

 

전형적인 In-sourcing의 형태로 당시 피폐한 조선상황에 따라 전쟁물자의 원가절감을 위해 많은 노력을 시도하였음을 가늠하게 한다. 또한 거북선은 정보력의 승리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일본 해군의 전투양상은 해군이라기 보다는 배를 탄 육군에 가까웠다. 세키부네나 고바야부네등 적선에 칼로 무장한 군인들은 빠르게 근접 후 월선하는 방식의 전투를 하였는데 이에 착안하여 이순신은 월선행위 자체가 불가능 하도록 배의 갑판을 철침으로 덮어버리는 전략을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적의 화살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지 못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율포해전 (1592.06.05)

 

당시 전공(戰功)은 적의 목을 베어오는 것으로 평가하는 제도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배에 머리를 자르는 작두를 가지고 다니는 배들이 있었고 허위로 공적을 과장하기 위해 조선인의 시체를 잘라 공적으로 올리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지나친 전공다툼을 우려했다. 그는 언제나 개인전공보다 전체의 전황을 중요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매우 엄정한 군기를 유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인적자원관리의 핵심이다. 해전이 한창일 때 적병의 목을 베기 위해 싸움은 뒷전인 채 바다 속을 뒤지는 지휘관들에게 엄벌을 처했다.

 

율포해전 당시 이순신이 가덕도까지 보낸 척후병이 척후임무를 초과하여 적과 전투를 치루었고 적의 목까지 베어왔으나 이순신은 그들을 엄히 군율로 다스릴 것이라 다그치고 다시 바다로 내몰았다. 당시 수군은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연합함대를 꾸리고 있는 상태여서 연합수군의 팀워크는 굉장히 중요한데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기에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다. 결국 이 해전에서 적의 목 보다 더 값진 적선 3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개인의 욕심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결과였다. 그가 조선전체의 수군을 통제하면서도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런 철저한 조직관리 방법 일 것이다.

 

 

한산도대첩 (1592.07.08)

 

한산도대첩은 수적인 열세(56:73)에도 불구하고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활용하여 아군의 피해 없이 적선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함으로서 세계3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전쟁사의 드라마이자 임진왜란 해전의 가장 극적인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경영학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적자원 활용이다. 사실 학익진과 같은 방식은 오래전부터 보병전술로 널리 쓰이던 전술이었다.

B.C.216년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도 같은 전술로 7:1의 병력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순신은 최초로 이러한 진법을 해상에서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자원관리(Resource Management)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지적관리일 것이다. 율포 해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가치 정보와 적의 첩보를 배합하여 ‘이겨놓고 싸우는’ 전술을 구사하였고 이것은 오늘날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산포해전(1592.09.01)

 

이순신 장군의 효율적인 자원의 집중과 분산을 잘 활용한 재배분(Resource allocation)이 두드러진 전투이다. 당시 해상장악권은 조선의 수군이 어느정도 이루었으나 육지에 있어서는 전라도 공격에 나선 일본군들이 1,2차 금산전투에서 1500여명의 의승병들을 전멸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부산포는 적의 해상거점임과 동시에 적의 육군의 보급을 담당하는 군수거점이었다. 서두에 말한대로 전투는 식량, 군수품등 전쟁지속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선 유지가 필수적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부산포는 매우 중요하며 피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당시 삼도수군의 판옥선은 80여척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은 500여척에 달해 수적으로는 절대 열세였으나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순신은 전면전을 결심하고 조선수군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육지에 거점이 있는 일본과는 달리 선상에서 전투를 끝내야 하는 약점이 있는 조선해군은 폭풍이 부는 날을 피해 최단시간으로 목표상에 갈 수 있는 날을 택했고, 화력의 꼭지점인 2대의 거북선을 선두로 함대를 1열 횡대로 이동시키는 장사진(長蛇陣)을 펼치며 총통을 쏟아 부었다. 결국 130여척의 적선을 수장시키며 임진왜란 최대의 전과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아사와 식인행위가 빈번하였고 변변한 훈련도 힘들 정도로 자원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이순신은 아껴야 할 때와 써야 할 때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결국 그러한 집중이 최대규모의 전투에서 성과를 이끌어 내게 되었다.

 

 

 

결론

 

성웅이라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은 용맹한 무장과 인자한 덕장임과 동시에 뛰어난 현자이었음에 분명하다. 그의 언행은 오늘날 경영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어긋남 없이 매우 훌륭하였는데 특히 “전쟁”이라는 상황 하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인 “자원(Resource)"의 활용에 있어서 매우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인적 자원 활용에 있어서 그는 엄정한 신상필벌과 군기유지를 통해 추락한 군의 사기를 극대화 시켰으며 원균 및 중국의 여러 함대들과 연합함대를 구축했을 때에도 탁월한 리더십과 통솔력으로 승리를 일구어 냈다. 또한 휘하의 장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당시로서는 과감한 권한위양(Empowerment)-독자적인 작전수행을 허락함- 을 통해 선진적인 조직 관리를 꾀했다. 물적 자원 활용에 있어서도 그는 효율적인 부대운영을 강도 높게 실시하였는데 더욱이 열악한 조선의 경제상황과 수군의 상황 하에서 그는 여러 차례 현명한 지혜를 강구하였다. 대민지원이나 경력자 활용, 자체 교육 등을 통해 in-sourcing을 실시함으로서 운영비의 절감을 실시했고 그 결과 전투에서 충분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지적 자원 운영에 있어서 그는 매우 훌륭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성패를 가늠한 가장 중요한 ”정보력“에서 그는 절대 우위에 포지셔닝 하였다. 그는 다양한 전령과 통신수단, 첩보를 통해 시시각각 일본의 부대와 무기체계, 내부정보를 파악하였으며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리 대비책을 강구하여 전투 시 적의 다양한 의도를 무력화 시켰다.

 

이렇듯 전쟁의 모습이 경영의 모습과 많이 닮은 것처럼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영웅 시 해야 하는 경영자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 그는 용맹하고 지혜로웠으며 때론 인자하고 때론 엄한 모습을 한 위대한 경영자였다. 그는 도산위기의 회사에서 명예퇴직 당한 후 회장의 명에 의거 복직하였으나 이내 자신의 사업부를 성장시켜 경쟁자들과의 시장점유율에서 절대적인 경쟁우위를 지켜낸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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